양주에 잠든,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
북경기 역사의 중심, 양주문화 순례(3)
양주에 잠든,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
양주는 천년의 터 위에 세워진 역사의 보고(寶庫)로 북경기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다. 본지는 제1편 중종의 첫 부인인 단경왕후(1487~1557)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온능(溫陵)이야기’를 시작으로 제2편 북경기 행정의 중심지 ‘양주 관아지’를 소개했고, 세 번째로 3·1절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을 통해 다가올 미래의 시대정신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지 취재팀은 지난 23일 토요일 오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위치한 영원한 청년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의정부에서 39번 지방도를 따라 송추삼거리를 지나 장흥에 이르면 일영을 거쳐 고양시 덕양구로 향하는 371번 지방도로 방향을 바꿔 일영역을 지나 삼하리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이상재 선생 묘역 안내판이 없어 길가는 네 번째 주민에게 겨우 안내 받을 수 있었다. 마을 회관 건너편 마을길 1차선 소로를 따라 지그재그로 1.2Km 올라가니 눈 덮인 금바위저수지가 나타났고, 선생의 묘소는 그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충청도 한산에서 이장한 선생의 묘소는 노고산 3부 능선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잣나무가 들러 쌓인 가운데 서남향을 바라보고 있었고, 때 마침 서향하는 햇살이 묘소 잔디를 봄으로 인도하는 듯 아늑했다. 묘 옆에 세워진 묘비 정면(사진)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한문으로 쓰고, 시인 병영로 선생이 이상재 선생의 삶의 여정을 정리했으며, 김충현 선생이 누구나 읽기 좋게 한글로 새겼다. 또 묘소 앞에는 YMCA 상징인 심볼(약장)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연못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상재 선생은(1850년 10월 ~ 1927년 3월) 세계열강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려고 각축을 벌이던 구한말 독립협회활동과 YMCA운동을 통해서 민족을 계몽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나라의 진로를 개척하는데 앞장선 우리민족의 선각자이자 스승이었다. 그가 기독교사회운동에 헌신하게 된 계기는 탐관오리의 부패상을 탄핵하다 음모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처음 성경을 접했고, “기독교가 아니면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기독교신자 되기를 자청, 최초의 한국인 YMCA 총무(황성/서울)로서 평양YMCA 총무 조만식 선생과 더불어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길을 밝게 열어 주는 등불의 역할과 독립의 초석을 만들었다.
또한 선생께서는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을 승화시키기 위해서 전개했던 물산장려운동과 절제운동은 오늘날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민족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품과 민족을 하나로 아우르는 따듯한 동포애는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진 오늘의 우리사회를 바로잡는 길잡이가 됨은 물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한국인의 사표가 될 것이다.
특히 남북분단의 아픔을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는 북경기지역 주민들은 남북분단의 세월을 딛고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야만 하는 우리 모두에게 선생의 민족정신을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더욱이 시대정신이 실종 된 우리의 현실을 감안 한다면 이상재 유훈이 양주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산이 아닐 수 없다. 현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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