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유일의 능, 온능(溫陵) 이야기
겨울 여행 추천 '양주 온능'
의정부에서 송추삼거리를 거쳐 고양으로 가는 국도변에 양주시 유일의 능인 ‘온능(溫陵)’이 자리 잡고 있다. 온능의 주인은 중종의 첫 부인인 단경왕후(1487~1557)다. 본관은 거창. 좌의정을 지낸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1499년(연산군 5)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과 혼인하여 부부인(府夫人)에 책봉되었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연산군을 내쫓고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추대하면서 왕후에 올랐다. 그러나 반정모의에 반대했던 아버지 신수근이 성희안 등에게 살해되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7일 만에 폐위되어 본가로 쫓겨났고 딸린 자식 하나 없이 70평생을 먼 산만 보고 살았던. 조선시대 가장 비극적인 여인 중의 하나다. 사실 신수근은 잘못한 것은 없었다. 문제라면 뒷배가 좋았다.
연산군의 장인이면서 동시에 이복동생 중종의 장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는 죽음을 당했고 그의 딸은 죽을 때까지 식물인간이 되였다. 왕비로 복귀할 기회도 얻었다. 1515년(중종10년) 중종의 계비 정경왕후(章敬王后)가 나중에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죽자 조정에서 복위 논의가 있었다. 담양군수 등은 상소 올리며 복위를 요청했다. 그러나 대사간 이행이 그들을 처벌하려다 오히려 덤터기를 쓰고 물러날 만큼 큰 파란이 일어났고 복위를 주장하는 조광조파가 기묘사화로 모두 죽자 기회는 영영 물 건너 가버렸다. 열세 살에 남편 중종(당시 진성군)에게 시집갔는데 금슬이 참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종종은 언제나 단경왕후를 그리워했고 그때마다 궁중 높은 곳에 올라가 옛 왕비의 집이 있던 인왕산 쪽을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단경왕후(당시 서인이므로 ‘신씨’로 불렀다)는 남편과 같이 살 때 입었던 치마를 바위 위에 걸어 놓았다. 이후부터 인왕산 정상의 큰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가장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사랑 이야기다. 단경왕후는 그가 폐위 된지 233년만인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온능에 자리하고 있다. 양정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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