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림이 만난 사람
‘투명과 화합의 깃발로 인생 3막’ 신임 최성웅 한국연극배우협회장
최송림이 만난 사람 '최성웅 한국연극협'
봄의 한복판에서 새로 뽑힌 (사)한국연극배우협회 제10대 회장 최성웅 연기자(58세, 사진 왼쪽)를 만났다. 신임 최 회장의 거침없는 화두는 ‘투명과 화합’이다. “상머슴 일꾼으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투명하게 일합니다.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며 화합을 최우선 덕목으로 삼겠습니다. 그 동안 감사, 이사, 부회장을 거치면서 협회운영의 경험론적 노하우를 축적했고, 이제 회장이 된 만큼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의 굴곡진 연극인생은 서울 혜화동 연극촌(演劇村) 사람들이라면 웬만큼 다 안다. 한때는 극단 세미의 대표직을 갖고 대학로에서 ‘코메디 아트홀’ 등 소극장을 3개나 운영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배우치곤 조금은 특이한 경력인 육군대위 출신인데, 중앙대 신방대학원 연극영화과를 뒤늦게 나옴으로서 순전히 불도저 노력으로 ‘문무겸비’ 아닌 ‘예무겸비’ 배우가 됐다고나 할까? “연극쟁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시작부터 숱한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섰지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 예술과 생존 사이에서 방황하고 허우적대며 여태까지 버텨왔단다. 소위 말하는 흥행성 내지는 시장성과 예술의 경계선을 오가며 극단대표로서 기획, 제작, 극장운영까지 그야말로 북 치고 장구 치며 연극이라는 두 글자에 온 몸을 던져왔던 것이다. 특히 공연장 연합회 회장 시절엔 소극장 활성화와 불법적인 극장운영이라는 당국의 경직된 법률잣대를 바로잡고 양성화 시킨 개가는 작은 보람으로 기억된다고.
그렇게 열정 하나로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때론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져 쓴 맛을 보기도 했다. 바로 흥행 실패, 연극이 깨져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고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버스비조차 없어서 영원한 일터요 마음의 고향인 대학로도 못 나가는! “거기까지 제 연극인생 제1막이라면, 연극제작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TV에서 무슨 역이든 돈만 되면 닥치는 대로 뛰었던 시기가 인생 2막인 셈이죠. 단역배우라고 연극동료들의 눈총을 받으며 미친 듯이 출연하다보니 어느덧 빚도 갚게 되더라구요. 이제 내 연극인생의 고향인 대학로로 다시 돌아왔으니 멋진 제3막을 후회 없게 펼쳐보렵니다”
잡초적 현장경험의 성공과 실패도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다 연극적 재산이란다. 모든 역경을 뚝심으로 이겨낸 것은 오로지 연극을 한다는 자부심, 우리들만이 공유하는 연극정신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가능했겠느냐고 묻는다. 그를 보면 ‘연극정신’이 살아있는 한 그 어떤 시련도 극복하고 우뚝 설 수 있다는 희망이 선다. 그것도 맞지만 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든든한 디딤돌이요 버팀목은 평생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다가 지난번에 돌아가신 홀어머니와, 아내 구유진 교수의 내조라는 비밀병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무대 분장 디자이너로 유명한데, 태평양화학 아모레퍼시픽의 창업멤버 구용섭 고문의 딸이라는 사실은 잘 밝히지 않는다.
최회장은 임기 중에 대학로에 배우로(俳優路), 배우의 거리를 만들겠다는 ‘숙원사업’ 한 자락을 마지막 히든카드로 맛보기인 양 살짝 들쳐보였다. “연극배우의 날을 선포해서, 페스티발과 함께 배우의 거리에 원로 선생님들의 핸드프린팅(손도장) 행사도 하고… 생각만 해도 신바람나지 않습니까?” 봄볕에 구연동화를 펼치듯 이야기하는 그와 함께 있노라면, 그 어렵다는 연극판 온 세상이 천국처럼 행복해 보였다. 글/ 최송림 (본지 논설위원, 극작가)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