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아니기에 가능한…
“남의 처지나 고통을 헤아리는 마음이 마비돼 있었다.” 이런 고백적인 기록을 읽으면서 가슴이 뜨끔했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연민이 없는 사람을 정신분석학 쪽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인간형으로 규정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을 짐작하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고도 자신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등식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구태여 나눔이 필요 없는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그러나 이 세상에 나 홀로 완벽한 삶의 상태란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비록 이 세상 소리를 듣는 데는 귀 밝으나, 영적인 소리를 듣는 데는 절벽이나 다름없는 귀머거리였다.” 이 역시 지난 달, 타계한 박완서 작가의 책들을 읽다가 내 마음이 붙들린 문장이다. 그는 가셨다. “주여, 저에게 다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그의 기도대로 그는 많은 것을 남긴 채로 가셨다.
인간의 허위의식과 속물근성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 <한 말씀만 하소서>는 그 예리한 펜촉이 작가 자신을 향하고 있기에 독자들은 더욱 서늘함을 느낀다. 일기 형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 속에는 자신의 ‘날것’의 속내를 그대로 밝히는 작가의 절절한 육성이 들어있다. 남편을 여읜지 3개월 만에 하나뿐인 아들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그는 “나에게 지금 희망이 있다면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뿐이다.”라고 절망했었다.
‘자식 잡아먹은 어미’라는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은 독자들의 가슴마저 할퀴고 있다. 하늘 아래 죄인 아닌 인간이 없다는 대의명분으로 덮어버린다 해도 그의 속죄함에는 도저히 구원이란 없어 보였다. 그게 자식을 먼저 보낸 모든 이들이 스스로 받는 극형 같은 것이 아닐까.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랄까.” 이는 그 유명한 조선시대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곡자(哭子)>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죽은 자식을 통곡함’이라고 해석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역시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미 죽은 자식인데도 그것은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다른 자식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왜 내 자식을 그랬냐고, 한 말씀만 대답이라도 좀 해달라고 까무러치며 신을 원망했던 박완서는 “참척의 쓰라림으로 내 마음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져 있었다.”고 당시의 심경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그는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 갔을까?’에서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는 역전의 의지로써 결국 일어섰다. 이런 각성의 과정을 기록한 글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고통에서 숭고함으로 전이되는 감정의 극치에 빠져들게 된다. 나 혼자만 불의를 당하고 버려진 것 같은 처절함 속에서 깊은 깨달음의 음성을 듣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승리하는 삶의 희열을 느낀다.
작가는 수도원에서 우연히 만난 어린 예비 수녀님의 말 속에서 구원의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다. 그 수녀님의 남동생이 말썽을 많이 피워서 집안을 시끄럽게 하는 청년이었던 모양이다. 세상에는 속 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는데,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뭔데? 어린 수녀님의 이런 이야기가 작가 박완서에게 사고의 대전환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그는 “절벽 끝에서 다른 절벽 끝을 향해 심연을 건너뛰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아픔을 승화시킬 때, 절벽 끝에서도 꽃이 핀다.
아들이 없는 세상에서도 글을 쓰고, 다시 세상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작가는 우리에게 “나의 홀로서기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했다.”는 강한 메시지를 남긴다. 타인이라는 존재, 그것은 또 다른 ‘나’가 아니던가. ‘나’라는 존재를 성립시키고 증명해주는 데는 분명히 타인의 몫도 들어 있다. 내 자신의 독창성보다는 남의 관점이나 평가를 우선시하는 사회적 통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때 우리는 사실 서양의 개인주의의 합리성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고 했던가. 타인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기란 참으로 고난도의 기술인 것만 같다. 나와 친근하다는 이유만으로 지나친 사생활의 간섭을 넘어 상대의 감정까지 재단하려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순진, 무지했던 경험들을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박완서를 읽으며, 이참에 아주 마비되었거나 너무 질척거리는 타인에 대한 내 관심의 촉수를 점검해본다.
황영경 교수의 문화오딧세이'책이 있는 풍경'
글/황영경교수(신흥대학문예창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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