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경 교수의문화오딧세이 '책이 있는 풍경'
아, 전태일!
『전태일』을 다시 읽는 것은 고통이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특히 이런 그의 일기 원문들을 엿볼 때면 결코 반추하고 싶지 않은 잔혹한 과거를 확인하는 것 같아서 더욱 참담하다. 스물두 해 짧은 삶을 살다 간 청년노동자의 비망록에서 통찰의 혜안으로 빛나는 글귀들이 툭툭 튀어나와 독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쓸어내린다. 현자나 성자는 높은 학력으로 탄생하는 게 아님을 증명한 그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활발하다. “인간의 명석함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 이렇듯 전태일의 사상은 사랑의 철학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전태일 평전』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인권 변호사 조영래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 극비리에 원고를 가지고 나가 일본에서 먼저『불꽃이여! 나를 태워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 또한 이 책의 탄생 신화를 대변해 준다. 한국에서는 처음에『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저자를 밝히지 못하고 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조영래라는 저자의 이름을 명백히 밝히고 스테디셀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영어권을 넘어 세계 각국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으니 이야말로 진정한 ‘한류’가 아닌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다운 나이에 인간 도화선이 되어 산화한 그 이름을 다시 불러보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 원죄의 흉터를 만져보는 것. 그 청년이 간 지 올해로 마흔 해가 된다. 그가 떠나신 1970년 11월 13일, 우리에게 이 날은 아주 큰 복(福)날이 되지 않았던가. 그날 이후부터 일하는 사람들이 비로소 ‘목소리’를 내고 살게 되었으니까, 세상에 일 안하고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꼭 어머니가 해주십시오.” 어쩌자고 그는 어머니께 그 큰 짐을 덜컥 떠맡기고 갔을까. “그래, 기필코 하고 말겠다.” 어쩌려고 그의 어머니는 덜컥 약속을 해버렸을까. 까맣게 타버린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머니는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 게.” 꺼져가는 숨소리를 통해 아들의 통절한 혼은 “어머니, 정말 할 수 있습니까?”하고 세 차례나 되물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아들 예수를 지켜보아야 했던 성모 마리아의 경우와 비견되기도 하는데, 그렇다, 여기에 특정 종교인들 태클 걸지 말자.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제 몸에 불을 붙인 인간 그 청년에게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는 불교용어를 쓴다 한들 누가 시비할 것인가.
젊은 시지포스에게도 휴식은 필요할 터, 그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의 글을 남기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기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전태일, 그대 언제 다시 오시려는가. 기다려서 올 사람이라면 기다릴 수밖에.
어려운 노동법 용어를 해석해 줄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어도 좋겠다던 청계천 상가의 재단사 그 청년, 지금 딱 그만한 나이인 대학생들을 보면 나는 또 죄스러워진다. 비정규직 ‘알바’라도 뛰어야 할 그들에게 근로기준법 같은 것은 알 바가 아니다.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학생들의 눈빛이 어느새 깊어져 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왜 이럴까. 노파심으로 엊그제 그들을 맞았는데 벌써 산전수전 다 겪은 올드보이 모습들이 보인다. 아예 자신의 존재마저 잃어버린 듯한 좀비 같은 놈들도 더러 보인다. 거기, 니들, 태일이 형 알아?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 태일 씨! 청계천 버들다리가 그대의 이름으로 바뀐다는군요. 이번 주말엔 꼭 그대를 만나러 갈게요. ‘전태일 다리’를 건너가면 당신이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이 곧 나오겠지요.
글/황영경 교수(신흥대 문예창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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