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는 성스러움 그 자체 였다
한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을 오르다(2)
백두산 천지는 성스러움 그 자체 였다
아침 6시, 백두산 등정을 위해 호텔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9인승 밴 승용차를 탔다. 의정부 원-코리아 축제(Oen-Korea Festival)에 참여했던 조선족 여가수의 도움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차편을 얻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연길 중심가는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차는 시내를 빠져나와 ‘선구자’의 주 무대인 일송정을 바라보며 용정(龍井)으로 향했다. 용정에는 시인 윤동주(1917-1945)의 모교인 대성 중학교가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민족의 학교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신관과 구관이 있는데 신관에는 이름이 바뀐 용정중학교로 사용되고 있었고, 구관은 항일독립운동의 전시실로 활용하고 있었다. 전시실 앞에는 검정색 옥석을 바탕으로 자연석이 얻진 윤동주 시비가 찾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우리는 용정을 지나 백두산으로 향했다.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중국과 북한이 국경을 이루는 곳이다. 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고 불렀고 한다. 중국은 장백산(창바이 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白),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백두산이 우리 문헌에 최초에 등장한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기록됐고, 백두산 이름으로 최초에 기록된 것은 고려사(高麗史)에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는 기록이다. 또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태조 ‘왕건’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우리는 3대가 덕(德)을 쌓야 백두산이 천지를 볼 수 있도록 허락한다며 상대 조상 뒷조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다. 날씨는 다행히 쾌청이다.
백두산 정상을 오르는 코스는 3개(서파, 남파, 북파)인데 우리는 북파를 선택 했다. 이곳은 백두산 등정이 쉽고, 장백폭포를 볼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코스다. 10년 전 이곳에 왔을 때와는 관광시스템이나 분위기가 많이 개선 된 것 같다. 우선 개인차량이나 관광버스를 백두산단지 밖에 두고 허가된 버스만 이용하도록 한 것과 경제 성장에 따른 내국인(중국) 관광객이 급증한 것이 눈에 띠었다. 우리도 백두산 오르기 위해 5줄로 길게 늘어선 셔틀버스 승차대열에 끼었다. 백두산을 정상에 가려면 두 번에 3가지 티켓을 끊어야 한다. 첫째는 백두산 입장료(125위안, 2만2500원), 관광단지내 버스승차권(85위안, 1만5300원)을 두 번째는 백두산정상가는 10인승 승합차량 승차권(80위안, 1만4400원)이다. 그러니 백두산 등정을 위해서는 총290위안(5만2200원)이 소요된다.
셔틀버스는 백두산 입구에서 정상 출발점까지 30분정도 소요 된다. 가는 길가에는 소나무, 잣나무, 흰색줄기의 이름 모를 나무들이 우리를 반겼고, 멀리서 보이는 백두산의 위용은 우리를 설레게 했다. 필자는 이번이 4번째 등정이지만 갈 때마다 새로움이 더하는 신비의 성산이다. 혹 날씨 변화에 긴장하며 정상으로 향하는 정류소에서 10인승 봉고로 갈아탔다. 봉고는 굉음을 내며 곡예 하듯 백두산 언덕을 굽이굽이 휘몰아가며 10.2Km을 20분 만에 정상이 보이는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다. 정상을 향하는 수많은 사람과 더불어 10여분 올라가니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 정상에 발을 딛었고, 정상에서 본 연 하늘색 천지는 신비로움과 성스러움 그 자체 였다. (다음호 계속)
현성주 편집국장
백두산 천지는 성스러움 그 자체 였다
백두산 정상에서 필자(좌측)와 문창운 맛 칼럼리스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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