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성산(聖山)-백두산에 오르다(4)
중국에서 바라본 북한국경마을, 이 다리로 북`중간에 교역이 이루어 지고 있다
“한발 더 가면 우리의 북한 산하데.....”
장백폭포에서 백두산 입구(매표소)까지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백두산 관광객들이 질서가 무너지면서 셔틀버스에 먼저 타려고 아우성이었다. 우리일행은 그래도 운이 좋았다. 버스가 우리 앞으로 정차하는 덕택에 순식간 모여든 사람에 떠밀려 승차 기회를 얻었고, 우리가 탄 셔틀버스는 태워 달라는 인파를 피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백두산 매표소에 겨우 도착했다.
우리는 서둘렀다. 연길 시내에서 오후7시에 만나기로 한 L씨와의 약속을 위해서다. L씨는 연길에서 국제경제유한공사를 운영하는 중견 경제인으로 국제무역을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백두산 가는 길을 역순으로 돌아가며 7시 조금 넘는 시간에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L씨는 우리를 위해 제법 큰 식당을 예약하고 우리를 반겼다. 중국 특유의 음식을 나누며 빠이주(빼갈)로 우정을 쌓아갔다. 술이 들어가니 남자들도 수다스러워졌다. L씨는 교사로 있다 사업을 시작했고, 지금은 북한과 광업계통의 사업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연길근교에 기독교 권사인 어머니와 제비집이 유난히 많은(10개 이상)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고, 다음 연길 방문 때, 가기로 약속하며 밤이 깊었다.
다음날 아침 9시, 냉면으로 해장하고는 북한의 중국 관문 중에 하나인 도문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문을 택한 것은 연길시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져있어 접근이 쉽고, 두만강과 북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접경지역이기 때문이다. 도문이라는 지명은 1933년 때 처음 사용했는데, 토문(土們), 두만(豆滿)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도문시는 백여년 전 함경북도 남양군 일대의 조선 사람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해 14만 명의 도시로 성장했고, 아직도 60%정도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우리는 북한이 잘 보이는 도문 해관(우리는 세관) 앞 다리로 갔다. 현재 북한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고, 하루 1번씩 북한으로 오가는 철도가 보이는 곳이다. 국경은 작은 냇가를 사이에 두고 북한 남양시와 마주하고 있다. 북한을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보기위해 중국 인민복차림의 무뚝뚝한 남자에게 20원(약36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북한으로 향하는 다리 중간까지 갔다. 한발 더 가면 우리조국 산하데 만감이 교차한다. 북한쪽은 민둥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보초서는 군인이 나무사이로 간간이 보인다. 참 안타깝다.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았는지?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민족임에도 이렇게 먼발치에서 봐야하니 마음 한 구석에서는 화가 치민다.
치민 마음을 달래며 인근에 위치한 두만강 유람선 선창가로 향했다. 대나무형태의 PVC로 만든 10여대의 나룻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 부착된 개인용 의자에 우리일행이 앉으니 나룻배는 소음을 내며 두만강 상류를 향했다. 한국 사람을 상대해서 그런지 북한 땅 가까운 곳으로 배를 몰았고, 우리말로 된 두만강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참 묘하다. 중국 땅에서 우리말 노래를 들으며 황량한 북한을 바라보는 기분이란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봉오동 저수지 인근에 위치한 봉오동전적지로 향했다. 우리 한 민족에게는 특별한 감회가 서려 있는 곳이기에 도문에 오면 꼭 둘러야 할 곳이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장군이 일본군 대대병력을 섬멸해 독립운동사에 청산리 전투와 버금가는 독립무장투쟁의 현장인 곳이다. 옷깃을 여미며 한글로 된 기념비 앞에 잠시 묵념했다.(다음호 계속) 현성주 편집국장
한민족의 성산(聖山)-백두산에 오르다(4)
한민족의 성산(聖山)-백두산에 오르다(4)
한민족의 성산(聖山)-백두산에 오르다(4)
(위부터)부한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두만강 유람선 선착장, 북한으로 가는 철도다리, 북한 돈을
기념품으로 파는 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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