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의 저자 김영순 원장의 삶과 예술세계(2)
영문도 모르고, 평양을 떠나 요덕수용소로
지난 9월15일(목)오후7시, 북경기신문 노종호 홀에서 열린 통일문화재단(이사장/서기원) 주최, 2011통일 가을 논단에는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의 저자 김영순 원장(74세, 최승희무용교육원)을 초대, 그녀의 경험한 북한의 삶을 통해 북한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그가 고백한 이야기를 3번에 나눠 연재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무용가 최승희 선생은 어떻게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 졌나?
=최승희 선생님이 숙청당한 공개적인 이유는 선생님 작품인 ‘사도성 이야기’에 중(스님)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 무용이 사회주의 현실하고는 다른 퇴폐적이라는 것, 일본 앞잡이들을 내세워 공연했다는 것, 반동분자 제자를 감쌌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문화선전부상을 지낸 남편 안막과 함께 평남북창관리소(정치수용소)로 격리 이송됐고, 최 선생님은 자유 분망한 예
술가로 북한에서 견뎌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인민군 협주단 무용배우로 평양시 보통강구역 상점상업부 지도원으로 근무하는 했는데?
=총정치국 산하 예술단으로 국, 내외 공연을 통해 북한체재를 선전하는 선전선동부에서 13년 근무했고, 제대 후 평양의 상점상업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상점상업부는 북한의 고위급들이 이용하는 상점으로 김경희 당 경공업부장(우리나라의 장관급), 장성택의 누이 장계순 성악배우, 허담의 부인 김정숙 조선직업동맹부위원장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과 외국으로 발령받은 대사급이나, 투사, 북한고관들이 물표(북한당국이 발행하는 교환권)를 갖고 오면 양복을 맞추거나 필요물품으로 교환해 주는 곳으로 당시에는 일제가 많이 있었고, 지도원의 권한도 많아 어렵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김 원장이 어떻게 악명 높은 요덕 수용소로 가게 되었습니까?
=아침에 출근한 남편이 이유 없이 사라졌고, 서(西)평양역에서 연행되어 요덕수용소에 수감 되어 몇 년이 흘렀어도 내가 왜 여기로 왔는지 몰랐습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캄캄한 보위부 안가에서 두 달 동안 다그치는 보위부 담당지도원에게 마음에도 없는 ‘후과(죄과)를 빚었다면 응당 책임을 져야하고, 키워준 당이 취한 조치에 응 하겠다’고 말했고, 이를 근거로 보위부는 나와 칠순의 아버지, 어머니, 자녀 4명(10살, 8살, 6살, 2살)을 요덕수용소로 보냈습니다. 내가 요덕수용소로 숙청당한 이유는 몇 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1967년부터 김정일 세습체제를 공고이하기 위해 김정일 세습에 걸림돌이 될 만한 일은 모두 제거했다.
그 중 성혜림이 문제가 되었다. 성혜림은 이미 월북작가 이기영의 아들 이평과 결혼한 유부녀로 ‘분계선 마을에서’ ‘온정령’ 등 영화 여배우로 활약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정일의 동기생인 이평의 남동생이 김정일과 함께 놀러왔다 동기생의 형수인 성혜림에 반했고, 봉화진료소에서 장남 김정남을 낳았다. 이런 연고로 성혜림 보안유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성혜림을 아는 사람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다. 성혜림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고 5호택(최고권력자 관리실)으로 간 것을 알고 있는 나를 보위부가 가만둘 리 없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겠지만 수용소 생활은 어떠했나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버지, 어머니, 두 아들과 딸이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죽을 때마다 제대로 장사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거적때기에 시체를 둘둘 말아 밭고랑에 버릴 수밖에 없었.....(복받치는 감정으로 눈물 흘리자 청중들이 박수로 격려) 남편은 1970년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어 죄명이 무엇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름이다. 수용소 생활은 새벽 3시30분에 기상해 해가 질 때까지 강제노역을 해야 하고, 밤늦게까지 사상투쟁회의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말로 어찌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요덕수용소 이후 어떻게 살았는가?
=9년 만에 요덕 수용소에서 출소하여 함흥으로 나왔습니다. 출소이유는 성혜림의 아들 김정남의 존재가 김일성에게 알려져 그랬는지, 지인의 도움이었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나는 함흥에 있는 중흥광산에 배치됐으나, 중흥광산 근처에는 집이 없어 30여리 떨어진 집을 배정 받아 살았다. 중흥광산은 금을 캐는 광산으로 건조로 작업(원석을 가루로 만들고 물을 썩어 고운 가루를 만드는 작업)에 투입됐다. 작업은 원시적인 것으로 고됐지만 노동의 대가로 생필품과 비누를 받았다. 그러던 1980년 초, 명절을 맞아 함흥시내에 나왔다 우연히 평양에서 온 아는 안전원을 만나 함흥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고, 비법(불법)으로 녹말가루, 비누, 명태와 2000원을 주고 공민등록과 재혼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그해 여름 함흥으로 이주 할 수 있었다. 함흥에서는 바느질을 배웠고, 양복점에 취직하여 700원-1천원의 월급을 받았다. 당시 쌀값이 1Kg당 120원으로 생활은 안정을 찾아 갔다. (다음호 계속) 정리/ 하창임 이사
<바로잡습니다>
지난 호 최승희 선생이 1958년 숙청당해, 1967년 평남 북창관리소(정치수용소)에서 57세의 나이로 영양실조로 죽음을 맞았다고 소개한 것을 59세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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