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현장탐사(5)항일 독립운동의 메카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현장탐사(5)항일 독립운동의 메카 ‘블라디보스토크’
최재형 선생 생가(위)와 최재형선생
특별기획, ‘경원선 복원’ ‘대륙의 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현장 탐사(5)
항일 독립운동의 메카 ‘블라디보스토크’
리콜라이2세 기념탑이 있는 ‘포크롭스키 성당’을 나와 우리가 향한 것은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극동연방대학교 교육과학박물관이었다. 극동연방대학교(FEEU)는 니콜라이(Nikolai) 2세의 지시에 따라 1899년 설립됐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 통치기간 동안 잠시 폐교되었지만, 1956년 다시 문을 열었다. 극동연방대학교는 극동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대학으로 학생은 3만5000명에 교직원이 4000여명이다.
이 대학은 극동 러시아 과학아카데미가 인증한 자연과학 연구기관들과 공조하여 학문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기초 및 응용과학 분야에는 수준 높은 연구로 평가받으며 사할린의 오일 및 가스 프로젝트에 있어 생태학 전문지식을 갖춘 과학 연구센터를 이끌어오고 있다. 최근 러시아와 세계적인 대학들 사이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한국, 일본, 미국, 중국 및 뉴질랜드 등과 64개의 교환프로그램을 포함해 80여 개의 파트너십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교육 박물관은 부속시설로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극동지역에서 나오는 기괴한 광물 표본과 육지의 호랑이, 바다의 거북이, 하늘을 나는 새 등 수백 가지 생물체들이 박제되어 있고, 극동지역에서 출토된 원시 토기부터 근대 생활양식인 측음기까지 다양한 물품을 만날 수 있었다.
<중앙광장 동상, ‘의병, 반일 사상고취’>
4층 박물관 계단을 오르내리며 각종 전시품을 감상한 우리 탐사팀은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거리 중에 하나인 알레우트스카야 길을 따라 걸었다. 길옆의 풍광은 정겨운 아시아의 유럽이면서 러시아 특유의 채취가 느껴지는 건물들이 우리의 피곤함을 잊게 했다. 30여분 후 연해주청사가 있는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중앙에는 3개의 웅장한 동상(1961년 건립)이 연결되어 있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현장탐사(5)항일 독립운동의 메카 ‘블라디보스토크’
30m 높이의 역동적인 동상의 주인공은 ‘볼세비키가 사회주의 체재를 위해 내전을 벌일 때 1920년 극동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민 혁명부대의 군인 상이다. 우리로 치면 의병이다. 이들이 바닷가를 향하고 있는 것은 혁명세력 반대편을 지원하던 일본의 간섭에서 해방된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동상하단 주춧돌에는 ‘극동지역에 소비에트 세력을 위해 싸운 전사에게(1917-1922)’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양 옆에 2개의 동상은 1917년 혁명을 기념하며 발틱의 선원과 볼세비키 혁명전사가 서 있으며 발아래에는 군주 제도 타도를 상징하는 처참한 모습의 쌍두독수리가 있다. 또 하나의 동상은 1922년 파르티잔들이 일본의 간섭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해 세웠는데 당시 활약하던 군인, 노동자, 지도자의 역동적인 모습을 조각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현장탐사(5)항일 독립운동의 메카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청사
<경쟁의 땅이 화해와 협력의 땅으로>
극동은 한국, 북한, 러시아, 일본, 중국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곳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러일전쟁 등 지역 주도권을 잡기위해 전쟁을 불사했던 곳으로 군사적 측면에서 중요성이 크다. 그러므로 블라디보스토크는 극동의 중심이기에 크고 작은 군사시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중앙광장 인근에 극동함대가 주둔해 있고, 도시 곳곳에 방어벽과 전쟁의 상흔이 전해지고 있다. 해변가를 끼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 할 목적으로 세워진 ‘요새’가 박물관으로 변신했고, 극동함대 주력부대로 군함 10대를 격파하며하는 등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S-56잠수함’이 퇴역 후 박물관이 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또 각종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명단이 새겨진 ‘전쟁희생자 탑’과 그 아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러시아 땅에서, 독립운동가 최재형 만나>
우리 탐사 팀은 짧은 시간에 가능한 많은 것을 보기 위해 강행군을 거듭했다. 지도를 들고 이곳저곳을 찾았고, 어떤 때는 헤매기도 했다. 어두워 질 때 쯤 어제 들렀던 아드미랄나 포킨나 거리에 돌아왔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것은 저녁식사나 호텔귀가 등이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일정을 위해 준비 중 포킨나 거리 한쪽 구석에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생가 한글표시를 발견했다. 우리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생가에 다가갔다.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 경원(慶源) 출신으로 노비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9세 때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는 장사해 돈을 많이 벌었으나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고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병합되자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우선 블라디보스토크에 계동학교를 설립한 이범윤(李範允)과 상의, 국민회를 조직 회장이 되고, 의병을 모집했으며, 1908년 4월 얀치혜에서 이범윤, 이위종, 엄인섭,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 총장에 추대되고, 항일의병 활동자금으로 거금을 내놓았다.
또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이를 맡아 재발행하고 이 매체를 통해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을 절규했다’ 이밖에 최재형 선생은 노우키예프스크 한족민회(韓族民會) 회장 취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 무장투쟁을 준비하다, 우수리스크에서 체포 되 이송 중, 탈주를 시도하다, 총격을 받고 순국한 독립유공자다.
취재/ 현성주 기자, 사진 배정옥 시민기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현장탐사(5)항일 독립운동의 메카 ‘블라디보스토크’
극동함대 소속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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