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일의 '천상병(1930년~1993년) 상'
“가난이 직업이었고 천심(天心)시인이었으며 무소유와 자유인의 초상이었던
천상병 시인은 그를 사랑하는 지인들의 마음속에 묻혔고 묻혀서도 이렇게 살아있다”
'천상병(1930년~1993년) 상'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제16회 천상병 예술제가 오는 4월 19일부터 28일까지 의정부예술의전당 일원에서 개최된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벌써 26년이 되었다. 살아생전 천상병 시인의 지인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본지는 2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천상병 시인은 1930년 1월 29일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부모와 귀국하여 경상남도 마산에서 자랐으며 마산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다녔지만 4학년 때 그만두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때에는 미국 통역관으로 근무했으며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재학 중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그는 당시 문학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대단한 주당이자 기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1993년 4월 28일 63세의 짧은 ‘소풍’을 마치고 ‘귀천’했다. 서울 노원구 수락산 등산로에 천상병 공원이 있다. 여기에는 천상병 시인의 유품 203점을 묻어놓은 타임캡슐이 있는데 천상병 시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130년 공개된다고 한다.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다시없을 순수 영혼 나의 남편 천상병”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1935년~2010년) 여사는 2006년 문학사상 4월호에 실린 “다시 없을 순수 영혼 나의 남편 천상병“이라는 글에서 남편을 이렇게 추억했다. ”나의 남편 천상병 시인은 한마디로 남편이라기 보다 늘 일곱 살짜리 같다는 별명을 붙일 만큼 아기 같은 심성을 가진 남편이다. 때로는 깔깔 웃다가 마음에 안 들면 ‘문디 가시나’(본인은 애칭이라 함)라고 말을 뱉곤 했다.
남편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오빠를 따라 서울에 왔다가 명동 '갈채다방'에서 그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으로 시작됐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살게 되면서 '갈채다방'에 더욱 자주 들르게 됐다. 그때 많은 문인들과 만나게 되었다. 서정주 선생님을 비롯해서 김동리 손소회 박기원 황금찬 박재삼 이근배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계셨다. 오빠는 '금문다방' '은성다방' 등 여러 곳을 나를 데리고 다녔다.
오빠 친구들이 동생처럼 아껴주시고 귀여워해주셨기에 천상병 시인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오빠 친구들과 함께 영화도, 연극도, 대폿집도, 자연스럽게 다녔다. 그때 나의 눈에는, 많은 문인들의 모습이 순수 그 자체처럼 보였다.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돌이켜 생각해본다.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시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택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생긴다. 그러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으로, 잘 견디어낸 나 자신에 감사하고 싶다“라며 천상병 시인을 그리워 했다.
천상병 시인과 술동무로 절친한 사이였던 신경림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천상병은 절친한 친구인 시인 김관식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김관식도 골탕 먹이고 술 사먹을 돈도 벌 겸 김관식의 집에 있던 오래된 책 한권을 몰래 봉투에 담아 이를 고서점에 팔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김관식이 이를 눈치 채고는 천상병이 훔친 책을 몰래 봉투에서 빼내고선 대신에 낡은 원고지 한 뭉치를 넣어버렸다. 이를 모르고 고서점에 책을 팔러 갔던 천상병은 되려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는데, 김관식은 이 광경을 보고 배꼽이 빠져라 웃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천상병에게 따로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다음호 계속)
<천상병(1930년~1993년) 하>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천상병 이야기>
제16회 천상병 예술제가 오는 4월 19일부터 28일까지 의정부예술의전당 일원에서 개최된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벌써 26년이 되었다. 살아생전 천상병 시인의 지인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본지는 2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주 주)
1995년 발간된 천상병 시인의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청산출판>에는 그의 작품도 수록되어 있으며 또한 살아생전 천상병 시인과 친했던 지인들의 ‘천상병 이야기’도 담겨있다. 시인이며 극작가인 신봉승(1933년~2016년) 선생은 천상병 시인의 부음에 “상병아, 네 부음이 내게 전해진 것은 네가 눈을 감은지 다섯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그때 나는 슬프다는 느낌보다는 허황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네가 죽으면 나는 슬퍼해야 옳은데도 왜 이리 허황해지는지 모르겠구나. 우리는 40여 년 전 폐허나 다름없는 명동거리에서 만났었다. 엇비슷한 또래들이 몰려다니면서 차비를 털어 막걸리를 마시고는 한강 건너 흑석동에 있는 하숙까지 걸어서 돌아가곤 했었다.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을 재고 맞추는데 귀신같아야 했었지”라며 천상병 시인을 회상했다.
민속학자인 심우성(1934년~2018년) 선생은 “누구의 소개로 무슨 계기로 천형과 처음으로 친교를 맺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당시의 이른바 명동패(실은 주정뱅이패라는 것이 더 적절하겠지만) 사이는 몇 군데의 정해진 술집과 다방에서 자주 만나다 보면 술도 나누고 차도 나누고 그리고 친구가 되는 관계였으니 말이다. 6.25난리 직후라 사는 꼴도 모두가 말이 아니요 또 경험하지 않아도 좋을 끔찍한 일들을 겪은 끝이라 조금만 술기운에 젖고 보면 헛소리가 나오던 그런 시절에 우리는 어울리기 시작한 것이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황명걸 시인은 “내가 천상병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 인사동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서였다. 그가 ‘문예’에서 시 「강물」과 「허윤석론」을 가지고 이색적으로 등단하여 한참 촉망받고 있을 즈음이다. 동인지의 효시격인 2인지 ‘처녀지’를 내어 에세이 ‘나는 반항하고 거부할 것이다’라는 타이틀을 명제로 조숙성을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나는 그를 천재로 알았다. 그런 까닭에 그의 용모 또한 범상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 그는 나를 저를 따르는 대학동문 후배라 그저 귀엽게만 보았을 터이고 나는 그가 무작정 좋아 응석으로 말을 놓기도 했는데, 둘이 함께 붙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친구처럼 되고 해라로 굳어버리게 된 것이리라. 하나 그리 된 연유는 오직, 격의를 털어버리고 상대를 편하게 대해 주는 그의 소탈한 성품 탓일게다”라면 젊은 시절의 천상병 시인의 소탈한 모습을 그렸다.
<오월의 신록>
오월은 신록의 달이다./
파란빛이 온 세상을 덮는 오월은/
문자 그대로 신록의 달이다.
파란 빛은 눈에 참 좋다./
눈에 좋을 뿐만 아니라/
희망을 속삭여 준다.
오월 달은 그래서/
너무 짧은 것 같다./
푸른 오월이여 세계의 오월이여
*이 시는 천상병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다. 1993년 월간조선의 청탁을 받고 써둔 것인데 운명할 때 윗옷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일본 프로야구를 좋아했던 천상병>
부산의 원로시인이며 국제신문 논설주간이었던 김규태(1934년~2016년) 선생은 “그는 클래식 음악을 아주 좋아하여 코로 흥얼거릴 정도였다. 또 한 가지는 일본의 프로야구에 아예 심취하다 시피 했다. 야구시즌이 시작되면 반드시 야구중계를 들었고 거기 등장하는 각 프로팀의 면면들을 꽤나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일본 프로야구에 심취한 천상병, 좀처럼 이해가 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는 시간만 나면 그 프로야구 기사를 읽기 위하여 국제신보사를 자주 곧잘 들렸다. 당시 신문사에는 요미우리 아사히 정도는 구독하고 있었으니까. 묵은 신문은 언제나 한쪽에 밀려 천대받기 일쑤였는데 그는 그 신문철을 일일이 뒤져 야구기사만을 골라 가져가는 것이었다” 라고 야구에 심취된 천상병 시인을 추억했다. 가난이 직업이었고 천심(天心)시인이었으며 무소유와 자유인의 초상이었던 천상병 시인은 그를 사랑하는 지인들의 마음속에 묻혔고 묻혀서도 이렇게 살아있다. 글/이관일(시인, 자유기고가)
이관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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