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에세이 '과정이 아름다운 청년' 송몽규
문화 에세이 '과정이 아름다운 청년' 송몽규
‘동주’의 새로운 주인공 송몽규를 생각하며
'친구(friend)'는 '자유(free)'라는 의미를 가진 말에서 유래되었다. 즉 친구란 우리에게 쉴 만한 공간과 자유로움을 허락하는 사람이다‘ 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언제나 자신을 믿어주는 가족과 친구는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위안이 되고 행복이 되어주는 존재다. 요즘 우리 영화계의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 ’동주‘의 주인공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가 그런 사이다. 사실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만해도 송몽규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다.
시인 윤동주의 평생 동반자였던 송몽규(宋夢奎)는 1917년 9월 28일 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한범(韓範)이다. 아버지는 교육자였던 송창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큰고모 윤신영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촌지간이며 또 같은 해에 태어나 친구로 평생을 함께 했다. 하지만 평생이라는 말이 무색 할 정도로 두 사람 모두다 서른을 채 넘지 못하고 한 달 사이로 세상도 함께 떠났다. 어쨌든 송몽규는 동적(動的)이었고 운동주는 정적(靜的)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두 사람 다 같았다. 그래서 시인 이탄 선생은 ‘송몽규’라는 제목의 시에서 ‘항상 윤동주의 뒤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라고 시의 첫 부분을 시작했다.
송한범(宋韓範), 왕위지(王偉志) 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송몽규는 1930년 명동소학교(동기동창: 윤동주, 문익환)를 졸업하고 1936년 은진중학교를 중퇴(동기동창: 윤동주, 문익환)했다. 같은 또래의 친구들보다 조숙했으며 리더십이 뛰어난 그는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핚교에서 윤동주와 함께 많은 책을 읽으면서 글도 많이 썼다. 특히 그는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고,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새긴 자기 도장을 만들어 자신의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은진중학 3학년 때인 1934년 12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이 송한범(宋韓範)이라는 필명으로 당선되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애국지사 명희조 선생의 독립의식에 크게 감화되었다.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이었던 명희조 선생은 학생들에게 바른 나라사랑과 민족의식을 깨우쳐 주었다. 그는 명희조 선생으로부터 남경에 있는 낙양군관학교에서 2기생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지체 없이 은진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에 진급하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 때가 1935년 3월 이었고 나이는 19세였다.
1935년 10월 초 낙양군관학교는 폐교되자 송몽규는 당시 산동성 제남(済南)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 이웅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1936년 4월 10일 제남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6월 27일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었고, 8월 29일 청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16일 동안 구금되었다. 하지만 그의 혐의가 중하지 않았던지 9월 14일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경찰의 거주제한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북간도의 집으로 돌아갔다. 글리고 이듬해인 1937년 4월 그는 은진중학교로 복학하려 했지만 학교당국에서는 문제 학생이라며 복학을 불허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용정에 있는 윤동주 집에 기숙하면서 대성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때부터 그는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다잡았으며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했다.
그후 석 달 간격으로 한 집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같이 보냈고 자란 윤동주와 송몽규는 나란히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한다. 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서 유학 생활하던 도중 독립운동 혐의로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수감되었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한 달 간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동안 민족 시인으로 윤동주는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두가 다 아는 존재가 되었는데 윤동주와 함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졌으며,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갈망했던 송몽규는 우리 모두에게 잊어진 존재가 되었다.
1938년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시험을 치렀으며, 결과는 동반 합격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입주한 그는 윤동주, 원산 출신의 강처중과 함께 생활하면서 암울한 일제치하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연희전문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여서 송몽규는 비교적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송몽규는 같은 해 9월 12일 조선일보에 ‘밤(夜)’ 이란 시를 발표했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도 깊구나/ 홀로 밤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도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며 휘파람 분다’ 무척이나 서정적인 느낌의 작품이지만 이 시의 자간과 행간을 차분히 뒤져보면 참담한 일제의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자신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941년 4학년이 된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 학생회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잡지 ‘문우’의 편집을 맡았다. 그해 6월 발행된 ‘문우’에 ‘그는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란 시를 게재했으며, 윤동주는 ‘새로운 길’, ‘우물속의 자상화’를 발표했다. 당시 일제는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 금지, 언론사 폐간 등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에 따라 본문은 일본어를 사용했지만 시(詩)만큼은 언어표현의 특성상 조선어 표기가 용인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문우’는 일제의 강압으로 폐간되고 만다.
이런 어려움을 겪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두 사람은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그것은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전선으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일의식에 투철한 송몽규는 일본 유학을 떠나는 과정에서 창씨개명이라는 난관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집안의 강력한 설득으로 송몽규는 소오우라 무게이(宋村夢奎)가 되었고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가 되었다. 이때 창씨개명한 윤동주는 그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나중에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아무튼 이렇게 치욕을 감내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서양사학과에 들어갔고, 함께 응시했다가 낙방한 윤동주는 도쿄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했다.
여름방학이 끝난 뒤 윤동주는 릿교대학을 중퇴하고 송몽교가 살고 있는 교토의 사립 기독교계 학교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 그렇게 송몽규는 윤동주와 또 다시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다. 그것은 윤동주가 낙양군관학교 이래 요시찰인물이었던 송몽규의 우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 되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고희욱, 윤동주, 백인준 등과 자주 만나 조선의 앞날에 대하여 토론했다. 당시 일본경찰은 오래 전부터 송몽교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고 그를 수시로 감시하면서 그들은 송몽교와 고희욱, 윤동주와 나눈 대화내용을 엿들었고, 그들이 조선의 독립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경찰은 송몽규와 고희욱을 체포하여 시모가모(下鴨)경찰서에 구금했다. 이어서 하숙집에서 귀향을 준비하던 윤동주까지 체포했다. 1941년 5월 15일 실시된 개정 치안유지법은 한층 엄격해지면서 ‘준비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면 검거가 가능했다. 사실상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던 당시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린 것이다.
1944년 4월 1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송몽규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윤동주는 이보다 앞선 3월 13일에 역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규슈의 북서쪽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고달픈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여 년이 지난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해 3월 6일 문익환 목사의 부친이었던 용정중앙장로교회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그 이튿날 3월 7일에 송몽규는 만27세의 창창한 나이로 윤동주와 함께 평생(?)을 함께 했다.
우리는 송몽규의 삶이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윤동주의 순수한 문학에 가려진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과 독립에 대한 열정은 우리민족의 가슴을 먹먹하게 해주며 앞으로 더더욱 그의 독립과 민족에 대한 열정이 더 많이 알려져 ‘과정이 아름다운 청년’으로 영원히 남기를 희망해 본다.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